저희부터 자식들이 성장해서 부모님을 모시거나 부양한다는 개념이 약해지기 시작된 세대일 겁니다. 그렇다고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맘까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활한다는 의식이 공고해진 세대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자연스레 저희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할 때에도 이런 의식은 이어집니다. 부모와 자식 각자 서로간의 독립적 경제를 유지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방향입니다.
가장 중요한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죠.
헌데, 매번 얘기를 꺼내면서 모두의 행복이라는 게 정말 뭘까요? 거꾸로 그럼 언제 행복하지 않은 걸까요?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주변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람
돌이켜 보면, 뭔가 주변을 의식하고 정해지지 않은 ‘이 정도?’라는 가치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면서 많이 불행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흐르고, 조금은 주변의 시선보다는 나와 우리 가족의 목표를 더 집중하고, 바라볼 수 있는 내 삶의 통제권이 생긴 듯 합니다.
제가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와 목적이 주변의 평가와 시선보다 앞선다는 단순한 깨달음이 맘을 편하게 하고, 불편하고 불행한 느낌을 떨치게 합니다.
삶은 선택해야 할 모든 변수들의 조합입니다.
내가,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모든 유한한 자원 안에서 선택을 통해 조합해야 합니다. 그게 돈, 능력, 시간 등등 많은 것들 사이에서 그렇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없고 그럴 수도 없죠.
하지만, 이런 끊임없는 비교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봅니다.
정글 속에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의 변화를 살펴야 하는 동물들을 보면 이런 주변의 평가와 시선은 생존에 직결되는 꼭 해야만 하는 활동입니다.
지금의 사회 속에서도 사실 이런 본능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지금 주변과 비교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변화하는 정글 같은 사회 속에서 나와 가족을 변화시키고 진화시켜서 살아남게 해 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그런 주변과 비교라는 살아남기 위한 이 본능적 활동이 정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왜곡되고 그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나와 우리의 삶과 정신을 망치고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듯 합니다.
끊임없는 비교와 알 수 없는 주변의 시선과 ‘이 정도?’라는 가치에 맞춰 물질적인 것들을 챙기고 챙기는 것이 나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지금의 우리는 과거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본능과 미래의 삶을 위해 필요한 본능 사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세대는 아닐까 싶어요.
과거 필요했던 본능은 환경의 변화를 빨리 알고 거기에 맞춰 생존을 위해 필요한 나와 가족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안에서 이 비교본능의 중요한 차이는 정보에 있습니다.
과거는 제한된 정보 때문에 내게 주어진 그 정보 안에서 비교하고 변화하고 적응하고 살아내면 되었습니다.
미래에도 이 비교 능력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비교는 내가 살아나가야 할 환경과 방향성을 잘 이해한 범위에서의 비교여야 함에도 지금은 정보의 홍수 속에 의미없는 비교를 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환경과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그 다양한 정보를 다양하게 비교하다 보면 그저 나는, 우리는 불행해 질 뿐입니다. 내가 살아 내야 할 미래의 방향을 위해 전혀 도움도 되지도 않습니다.
주변에 잘 나가는 재벌이나 연예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 분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고 씁쓸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비교가 나의 미래 생존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도 일부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재용씨는 지금의 신냉전시대에서 다시 한번 삼성을 변화시키고, 살아남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시는 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의 삶의 자원과 나의 자원을 비교하면서 불행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유한한 자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가다 불행해질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은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의 방향성을 아직 이해 못하고, 목적없는 주변과의 비교에만 익숙한 사람일 겁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나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비교를 선택할 수 있고, 의미없는 비교는 버릴 줄 아는 능력이 진정 필요한 시대가 지금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뭘까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 스스로도 하루에 몇 번이고 묻는 질문입니다.
주말에 성당에서 차분히 성모님께 매주 올리는 기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와 저희 가족의 행복을 돌봐 주십시오, 성모님…’
헌데, 막상 그 행복이 뭘까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물음표입니다.
가족과 사람 만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저로써는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얘기하는 삶을 앞으로도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와이프는 둘째를 챙기느라 해외에서 잠시 떨어져 살았습니다. 이때 맘의 상처가 생겼고, 나중에 알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둘째를 위해 속앓이 하면서 참아내고 견뎌준 와이프가 너무 고맙습니다. 지금은 조금씩 회복 중인 와이프를 응원합니다.
아이들은 지금 툴툴거리기도 하지만,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을 지나는 중일 겁니다. 본인들이 하고 싶어한 1차 목표였던 대입을 각자 나름의 역량 안에서 최선으로 풀었고, 지금은 2nd stage를 위해 뭘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준비해 가고 있으니 말이죠.
“아빠, 힘들어 죽겠어. 아빠 때에도 대학생활이 이랬어?”
“아니, 아빠는 대학 가기 전에는 공부하느라 정신 없었어도, 가서는 대학생활 제대로 즐겼지. 엄마도 그때 만났잖아.”
“그럼, 난 왜 이렇게 바쁜거야?”
애들에게 통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든, 연인이든 많이 만나 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친구들은 많아도 연애는 쉽게 못합니다. 연애는 맘에 여유가 생겨야 시작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런 연애를 맘놓고 할 수 있는 때는 각자 자리를 좀 잡은 다음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시절이 바뀐 게 맞죠.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목표가 비슷해지다 보니 거길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많아진만큼 거기 들어가는 시간과 투자도 늘어났고, 애들도 그렇게 길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70세를 살던 시절이니 인생의 중반은 30~40대였고,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사람이 흔치 않았습니다. 기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대학 때는 그런 기회를 보면서 대학시절은 즐기는데 시간을 보내도 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100세를 살고 있고,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이상을 사는 사람이 쏟아질 세상이죠. 인생의 중반이 50~60대가 되었고 인생의 Life Cycle이 완전히 바뀌는 중인데 사회 시스템은 이런 변화에 맞춰 발빠른 변화가 이뤄지지는 않다 보니 개인이 이런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경쟁력을 챙겨야 하는 시절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 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환상을 갖고 연애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닌 게 되어 버렸죠.
이런 변화는 흐름으로 진행이 됩니다. 각 부분에서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이고, 그 변화가 항상 균형되고 조화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주변의 변화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고, 내게, 내 가족에게 필요한 변화의 신호인지를 인지하고 적응하고, 진화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이런 과정 속에 ‘행복’이란 단어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여전히 Question mark입니다. 지금은 각자가 목표한 방향으로 잘 성장해 가고, 각자가 원하는 행복의 코드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 있기를 그저 바래 봅니다.
지금은 이게 행복의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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